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네 데카르트 (문단 편집) === 세 번의 꿈과 학문 === [[30년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접한 데카르트는 전쟁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톨릭|구교]] 진영에 속하는 바이에른 휘하 군대에 들어간다. 그곳에 있으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페르디난트 2세]]의 대관식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중, 독일 남부 [[울름]](Ulm) 근교의 작은 마을에 머문다. 그리고 1619년 11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커다란 벽난로가 지펴진 '난로 방'에서, 데카르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자주 분석되는 꿈을 꾸게 된다.[* 올림피카(Olympica)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일기장에 기록이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해당 일기를 출간하지 않고, 사후인 1691년 아드리앙 바이예(Adrien Baillet)가 쓴 데카르트의 전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첫번째 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첫번째 의심, 즉 인간 감각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두번째 꿈은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두번째 의심, 즉 꿈의 가설을 통한 몸의 실재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세번째 꿈은 코기토 증명에 나오는 세번째 의심, 즉 악마의 가설을 통한 '세상의 모든 지식'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그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잠시 졸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세 번의 생생한 꿈을 꾼 것이다. 첫 번째 꿈은, 거리를 걷다가 거센 폭풍이 불어서 필사적으로 아무 건물로 들어갔는데, 마침 그 건물이 그가 다녔던 라플라슈 학교였고, 캠퍼스에는 그가 잘 아는 성당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 성당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말을 걸기위해 발길을 되돌렸다. 그런데 괴팍한 바람이 "성당 쪽으로" 그를 강하게 밀쳤다. 그 순간 다른 지인을 보았고, 그는 데카르트에게 'N이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사온 멜론을 주기로 했는데 그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었고 그때 데카르트는 꿈에서 깼다. 잠에서 깬 그는 "깊은 슬픔을 느꼈으며, 이것은 나를 현혹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늘이 폭풍으로써 경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생각하며" 두 시간이나 잠을 설쳤다. 두 번째 꿈은, 데카르트가 방안에 있었다. 그런데 방이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 듯 한 날카로운 굉음이 들렸다. 데카르트는 이를 천둥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꿈의 폭풍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가 안전한 방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나운 비바람이 그에게 닿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백과사전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는 『시선집 (Corpus poetarum)』이라는 라틴어 제목이 붙은 또 다른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이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는데, 거기에 시 한 편이 있었다. 로마 시인 아우소니우스가 쓴 〈이딜 XV〉이라는 시였다. 그는 첫 행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Quodvitae sectabor iter?)" 그 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데카르트에게 제목이 '예, 그리고 아니오'인 아우소니우스의 다른 시를 내밀었다. 데카르트가 시선집을 잡으려하자, 그 책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백과사전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에 보았던 것만큼 완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그때 낯선 사람도 책도 사라졌다. 데카르트는 백과사전이 "모든 학문을 한데 모은 것"을 나타내고, 자신이 집으려 했던 시선집은 "철학과 지혜가 혼합된 것"을 가르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가 "피타고라스의 '예, 그리고 아니오'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며, 이것은 "인간의 지식의 진리와 오류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온 종일 데카르트는 세 가지 꿈에 대해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이 꿈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믿었다. 데카르트는 결국 1621년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이후 5년간 여행을 하면서 순수 수학에 몰두하였다. 이때 함수의 원리를 처음 계발하였다. 1626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소일거리로 광학기구를 만들던 중에, 1628년 당시 파리의 추기경이었던 피에르 드베륄(Pierre de Bérulle)과 만난다. 추기경은 데카르트와의 대화에서 그의 명석함에 감명을 받아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전념할 것을 권했다. 데카르트는 추기경의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간섭과 의무를 피해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가 수학, 과학연구에 힘썼다.[* 그의 합리주의적인 신사상이 종교적인 시비에 걸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당대 유럽에서 가장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던 [[네덜란드]]로 간 것.] 하지만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비밀리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글 『세계 (Le Monde)』를 저술하고 있었던 데카르트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353&aid=0000010379|선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